아직 풀리지않은 3대 미제사건 중 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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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1991년 3월 26일 선거 공휴일에 아이들 5명이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연, 김종식)
도롱뇽의 알을 주우러 와룡산으로 갔다가 실종이 됨.
그 날은 선거 공휴일이라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쉬는 날이었음.
그래서 아이들은 집앞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호연'이라는 아이의 집에서
세를 내고 사는 어느 한 청년이 "시끄러우니 밖에서 놀아라"라는 핀잔에
아이들이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도롱뇽의 알을 주우러 와룡산에 갔음.
(원래 도롱뇽의 알을 잡으러 간거였는데 와전이 되다보니까
개구리소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고 함.)
그런데 이 아이들 말고도 또 다른 아이 한명이 더 있었음.
바로 '김태룡(당시 10살)'이라는 한 학생이었음.
이 아이는 아침밥을 먹지 않아서 아침을 먹고 나서 같이 가기로 했었음.
이제 밥을 다 먹고 먼저 간 아이들을 따라갈려고 봤는데
산 입구에서 저 아이들이 아직 있는 걸 발견함.
하지만 어머니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함.
당일 도롱뇽 잡으러 갔다가 실종된 시간은 확실하지가 않다고 함.
왜냐하면 그 날 오전 아이들을 목격했던 목격자들이 여기저기서
그 당시 애들이 분유통 같은 걸 가지고 5명이서 떼를 짓고
다니는 걸 봤었다고 여러명이 말했기 때문..
그리고!!!
또 한명의 아이가 있었음...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함승훈'이라는 학생은 동네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같이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서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갔는데
그 때 오전 11시 30분쯤, 산 위쪽에서 10초쯤의 간격으로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고 함.
그리고 나서 다섯 아이의 행방은 묘연 해짐.
오후 6시가 되어서도 아이들이 안 돌아오자 부모님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함.
그런데 이 날이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선거 공휴일이었음.
그러니까 온 나라의 관심이 선거에 집중되었다고 함.
즉, 많은 경찰 인력들이 투표소 관리에 치중이 되어 있었던 것.
그러니까 초반에 경찰들이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 했다라는 말이 있음.
그래서 신고한 시각이 당시 7시 30분이었다고 함.
신고를 하고 경찰과 부모님들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와룡산 부근을 다 뒤짐.
하지만 계속 아이들을 찾을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찾게 되자,
실종 일주일만에 경찰은 이 사건을 '집단 가출' 로 처리함.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전대통령이 특별지시로
전국의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와룡산을 포함한 전국을 뒤지라고 함.
이 때, 가족들은 "와룡산 일대를 한다."라고 얘기를 했음에도
경찰은 와룡산 주변에 더 많은 인력을 배치해서 조사했다고 함.
즉, 가출로 방향을 잡았던 것.
그래서 경찰과 군인 인력 550명이 와룡산에 투입이 되었고,
그 외 근처 주변 상가가 위치한 곳에 1000명이상이 동원이 됨.
그런데 실제로 사건 직후 금품을 노린 범인으로 추정되는
어떤 한 30대 남성에게서 협박전화가 왔었다고 함.
하지만 이 사실을 끝까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고 함.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이들 실종 후 2~3일이 지난 시기에
한 30대의 남성이 김종식군의 집, 김종식군의 외삼촌 집으로 전화가 왔다고 함.
그러면서 현금 400만원을 와룡산 정상으로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고 함.
여기서 경찰이 금품을 노린 납치범의 소행으로 알려지면
이걸 따라한 모방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우려해서
이를 언론에 공개 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첫번째 협박전화가 오고 난 후 가족들이 돈을 들고 와룡산 정상에 갔다고 함.
하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음...
이후 또 다시 김종식군의 외삼촌 집에 전화가 왔다고 함.
그러나 경찰이 이 사건을 미리 가출 사건으로 단정을 지어서 그런건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경찰이 이에 대해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짐.
여기서 드는 의문점이
납치라면, 과연 한명이 초등학생인 다섯명의 남자아이들을 납치 한 것일까??
혹시 공범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니 괜히 돈 뜯어낼려고 허위정보로 장난전화가
올 수도 있다고 경찰은 판단을 내린 것일까? 하는 것임.
(일각에서는 당시 여러 장난전화도 왔었다고 함. 하지만 실제 저 전화도 왔었다고 전해짐.)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니까 온갖 음모론과 각종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에
주변인한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됨.
그 당시 카이스트에서 재직 중이었던 한 범죄심리학자가 주장하는 말이
"여기 이 아이들 중 김종식군의 아버지인 김철규씨가 아이들을 다
집근처에 암매장을 했을 것이다." 라고 함.
그래서 이 김종식군의 아버지인 김철규씨는 아들도 잃은 와중에 이런 음모론을 들으니까
굉장히 괴로워 하면서 사건 이후의 큰 후유증으로 술로 삶을 보내시다가
2001년 간암을 생을 마감하심..
경찰수사가 진행 중이었음에도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기억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던 어느 날.....
2002년 9월 26일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시민이
부패된 거 같기도 하고, 요즘 물건들이 아닌 거 같기도 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됨.
바로 다섯 아이들의 유골이었음...
당시 4명의 유골이 먼저 발견되었고 마지막 한명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되었음.
유골 감정 결과, 아이들의 사망 사인은 '둔기나 흉기로 의한 타살'로 밝혀짐.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철원군의 두개골 모서리에서
작은 구멍과 큰 구멍이 발견이 되었고,
총 다섯명의 아이들 중 3명의 아이들은 확실히 '둔기로 인한 뇌 충격'이 감식이 되면서
주요 사망 원인이 됨.
나머지 두명의 아이들은 부패된 상황과 당시 아이들의
유골 밖에 발견되지가 않은 점으로으로 봐서 정확한 사인을 단정짓기가 힘들다고 결론.
여기서 더 무서운 점은
우철원군은 두개골에서만 큰 구멍 2개와
총 25개의 손상이 발견됨.
물론 실제로 연구할 때 오래된 시신은 부패된 정도에 따라 사망 당시 나지 않았던 상처가 죽은 후에 생길 수 있다고 함.
하지만 이런 점들을 다 감안하고 총 25개의 뇌 손상이 발견된 것임.
이 손상들 중 10개는 끝이 날카로운 쇳조각으로 구멍을 낸 것이라고 함.
과학 수사에 따르면, 절대 스스로 넘어져서 머리에 날 수 있는 손상 아니라고 함.
그리고 김영규군 유골을 덮고 있던 돌 아래에서 마르지 않은 낙엽이 발견되었음.
또한 두개골에서 파리가 되어서 날아간 번데기 허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함...
즉, 이 사체들은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가 당시 발견된 곳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게 됨.
그리고 이 사체들이 숨겨져 있었던게 아니라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점..
게다가 김종식 군의 팔뼈가 부러져 있었음.
팔뼈가 부러진 원인은 굴러서 부러진 상황이 아니라
상대가 공격해서 팔로 온 힘을 막아 팔뼈가 부러진 상황일 때 발생되었던 손상이라고 감식 결과가 나옴.
그러므로 이러한 많은 정황들로 봐서 타살이라고 결정이 났음.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존재함....
1. 와룡산은 채 300m도 되지 않는 뒷동네 야산이라고 함.
즉, 이 뒷동네 야산에서 아이들이 추락사를 겪고 길을 잃었을 가능성이 극히 적음.
2. 당시 아이들의 나이는 초등학교 3학년~6학년임.
충분히 산을 내려올 수 있는 나이라는 점.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철원군이 당시 13살이었음.
실제로 이 사건은 2011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제작진들이 13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이 늦은 밤인데도 산 밑으로 내려올 수 있나 하고 실험을 함.
전혀 문제가 없었음. 바로 주위에 마을이 있음.
그러니까 아이들이 이 마을의 불빛을 보고 쉽게 내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함.
3. 이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옷 소매가 뒤로 묶여있었던 상태였다고 함...
그런데 이 매듭의 형태와 단단하게 묶여있던 수준이 잘 풀리지도 못하고 잘 풀지 못할 정도의 매듭이었음.
즉, 전문가가 묶었다거나 노끈 같은 걸 많이 묶어봤던 관련 직종의 종사자들이 쓰는 형태였다고 함.
4. 실종 당시 550명이나 인력을 동원해서 찾았으면서 10년이 지나서 도토리 줍던 시민이 발견을 함...
대략 300m 밖에 안 되는 뒷동네 야산에서 왜 사체를 이제야 발견한걸까..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아까 무서운 점에서 언급한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 계속 있었던게 아니라는 점에
생각을 하고 있음...)
5. 아이들이 당시 도롱뇽의 알을 잡으러 가봤자 산의 앞쪽에서 잡고 있었을텐데
정작 아이들의 유골은 산의 반대편에 묻혀 있었다고 함...
6. 한 두명도 아니고 다섯명의 아이들을 성인 한명이 온전하게 잡아둘 수 있었을까..
게다가 초등학교 3학년~6학년정도의 아이들을?
한명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7. 보통 사체가 부패를 하면서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이 떨어지는데
사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함.
근데 그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서는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이 안 보였다는 점...
이 외에도 여러 의혹들이 있음...
이러한 의혹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여기서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이상한 행동들을 보일 수도 있다." 라는 식으로 언급을 했었다고 함....
당시의 경찰 조사로는 (추측)
살인범은 일단 와룡산 일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
노동자였거나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
왜냐하면, 나중에 추정된 범행도구가
이러한 용접용 망치(일명 깡깡 망치) 라고 함.
(일각에서는 곡괭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함.)
결국 이렇게 수사를 하다가 수많은 의문점들을 남기고 어떠한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결됨...
이 사건도 꼭 해결돼서
유가족분들의 한을 풀었으면 좋겠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