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있었던 울산 청년 자살방조 사건 (판사가 문과 최종보스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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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이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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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청년 자살 방조 미수사건의 전말
지난주 통계청에서 2020년 사망 원인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자살이 줄고 있는 추세 속에서 10대~30대의 자살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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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김철수(가명) 씨는 1남 1녀 중 첫째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운동선수가 꿈이었습니다. 밝고 명랑한 아이였습니다.
철수 씨의 생활기록부에는 "행동이 민첩하고 친구들과 사이가 좋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행실이 바르다"고 쓰여 있습니다.
철수 씨는 어머니와 여자동생과 사이가 좋았지만 아버지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외도가 잦았고,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할머니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운동도 그만뒀습니다.
사춘기가 된 철수 씨는 아버지와 사이가 더욱 멀어졌습니다. 결석도 잦았고 가출도 몇 번 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가정환경으로 학습 의욕이 없고 기초 학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적혀있습니다.
철수 씨는 고등학교를 자퇴합니다.
"너 가 고등학교 나와서 뭐할래?"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여자동생이 눈에 밟혔지만, 결국 집을 나와버렸습니다. 아버지와는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래도 철수 씨는 열심히 살아보기 위해 애썼습니다.
오토바이 면허를 따 음식 배달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대학에 가려고 틈틈이 공부해 검정고시도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해도 대학 갈 형편은 안됐습니다.
궁핍한 환경은 철수 씨의 미래를 옭아맸습니다.
아버지와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철수 씨에게 어머니와 여자동생은 여전히 소중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철수 씨와 여자동생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십수 년 가까이 병을 앓으면서도 공장을 전전하며 철수 씨의 고시원 비용을 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 때문에 제대로 몸 관리를 못한 게 컸습니다.
철수 씨는 그 충격과 슬픔에 몇 달 동안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우울감으로 일까지 관뒀습니다.
하루에 1~2시간밖에 잘 수 없었습니다.
줄담배만 피우며 하루를 버텼습니다.
결국, 철수 씨는 생을 마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자신의 SNS에 죽음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2명의 다른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철수 씨는 이들과 SNS로 대화를 나누며 죽음의 동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그들은 함께 울산의 한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죽음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정신을 잃었고, 두려움을 느꼈던 다른 한 명이 119에 신고하면서 상황은 끝났습니다.
철수 씨는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주동자였던 철수 씨는 자살 방조 혐의로 구속돼 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보호관찰관은 철수 씨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이타적인 사람이지만,
자존감이 낮아 자기비하에 시달리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성격 평가서에는 "법과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살아왔으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어떤 때는 입고 다닐 옷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궁핍하여 부모가 조금만 도와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차분하게 진술했고 눈물을 자주 보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철수 씨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여자동생은 오빠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빠를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판부에 탄원서도 냈습니다.
동료 수감자들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선택하려 한 청년에게 깊은 공감을 나타내줬습니다.
철수 씨의 사연을 귀담아 들었고, 정서적 지지를 보냈습니다.
한 수감자는 철수 씨를 선처해달라며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철수 씨도 삶의 의욕을 되찾았습니다.
출소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겠다고 재판부에 약속했고,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하겠다고 판사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죄가 가볍지는 않지만, 뒤늦게나마 삶의 의지를 다지며 반성하고 있다는 점 등이 참작됐습니다.
판사 판결을 내리면서 "이제까지 삶과 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전 형의 선고로 모두 끝났지만,
이후 이야기는 직접 써 내려가야 합니다. 그 남은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이기를 기원하며,
설령 앞으로의 이야기가 애달프다 해도 절대 도중에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로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 때문일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게 됐고, 듣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이야기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판사는 여자동생을 찾아갈 차비가 넉넉지 않았던 철수 씨에게
"밥 든든히 먹고, 어린 조카 선물이라도 사라"며 20만 원을 건넸습니다.
철수 씨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 사건의 판결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졌습니다.
....(전략) 앞서 본 바와 같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자살예방에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한 결과,
2019년 자살백서에 의하면, 2017년에는 2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 등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자살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서도 광범위하게 자살이 발생하고 있다.
사망원인 통계에 의하면 여전히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사이에서 최고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자살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 처지가 크게 상이함에도, 피고인들이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공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 비춰 보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실감 때문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들 역시 불우한 유년기, 어머니의 사망, 경제적 파탄, 대인관계의 단절 등으로 인해 사회적 존재감이 계속 축소되다
극단적 고립감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직전 피고인들이 나눈 카카오톡 단체대화방 대화에는,
- 저도 어제 가불땡기고 신불자 작업대출까지 해서 올인났네요ㅠ
- 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죄송하네요
- 어유 다 그렇죠, 돈 있으면 죽을 일 있나요 뭐, 다 돈 때문이죠
- 네ㅠ
- 고생은요 무슨 기쁜 마음으로 갑니다
- 질소중독 치사량 쫌 알아볼 수 있나요? 암만 구글링해도 안 나오네요
- 저도 그거 찾고 있어요, 찾으면 바로 알려드릴께요
- 아침에 돈을 좀 썼는데 어찌어찌 6만 원을 만들었어요, 돈 구하기 진짜 힘드네요, 더 구해 볼께요
- 힘들죠
-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제가 제일 미안해요. 멀리서 오시구. 차 준비해주시구ㅠ
-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은 급할 때 3만 원 구하기도 힘들더라구요. 참 쪽팔리고 서럽더라구요ㅠ
- 맞아요
- 저는 2일 전에 치과카드선불 결제한 거 땡깡 부려서 현금 받아냈어요
- 우리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좋은 곳으로 같이 가요
-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 네 3번째 실패해서 하 지긋지긋하네요
- 무슨 일하세요? 저는 직업 없습니다
- 저도 백수 3개월차
- 너무 빨리 오신 거 아니에요?
- 전 집이 없어서요. 갈 데가 없어요. 방 보증금도 빼서 다 쓴지 오래라. motel만 지겹게 있었네요
- 전 덤프 몰아요
- 대단하시네요, 전 면허도 없는데
- 인생 하빠리 운전이죠 뭐
- 제가 좀 생각해 봤는데, 질소 혹시 부족할 거 같으면 제 핸드폰 파는 거 어떠신가요.
알아보니까 20만 원 정도 중고값 받을 것 같네요
라고 적혀 있다.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 피고인들이, 전혀 일면식조차 없던 상태임에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눈 마지막 대화가 자살에 대한 것이고,
사심 없는 순수한 생의 마지막 호의가 죽음의 동행이라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기로 마음먹었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서글프기 그지없다.
인터넷이 이제 사물에까지 연결되고, 소셜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된 이 시대에서
고립감을 견딜 수 없어 자살에 이르렀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역설적이고 가슴 아프다.
제프 딕슨은 일찍이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시(일부 발췌)에서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생활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 졌다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 한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더 나빠졌다”
고, 통렬히 지적한 바 있다.
제프 딕슨의 시에 빗대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시대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 너무 많은 단절의 두려움을 느끼고, 세상과의 접촉은 쉬워졌지만,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질병에 전염되고 너무 큰 상처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로 넘쳐 나지만, 너무 많은 정보는 타인의 행복을 너무 많이 보게 하고
우리를 타인과 너무 쉽게 비교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너무 많이 절망에 빠지고, 너무 많은 소외를 겪는다.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단 한명의 진지한 청자(聽者)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고인 A는 수사기관과 판결전 조사에서 왜 적극적으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명의 전화 같은 곳에 도움을 요청해 봤자 ‘힘내라’는 뻔한 충고가 전부일 것이라 생각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누구도, 심지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기관조차, 생의 기로에 선 개인의 불행과 고립감에
진지하고 실효성 있는 관심과 대책을 고민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피고인의 이 인식,
이 사회적 신뢰의 붕괴라는 이 지점이 다른 무엇보다 뼈아프다.
A 피고인의 믿음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철저히 타자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하고 축소시킨 다음,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밀봉해 온 사회다. 설령 한 개인이 열등하고 못나서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잘라내고 도태시켜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 때문이든, 환경 탓이 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못 본 척 할 순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방식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빨려 들지 않으리라는 장담 역시 할 수 없다.
공과금 몇 만원이 없어 단전된 싸늘한 월세 방에서, 몇 달치 치 월세가 밀려서,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사랑하는 이가 죽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아무도 곁에 없어서… 누군가 생을 끝내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수많은 이가 무수한 이유로 스스로 목 숨을 끊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저 관성적으로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죽는다.
살인과 강간이 끊이지 않고, 매일 서너 명이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익명이라는 베일 뒤에 숨어 저주를 퍼붓고,
서로 무시하고, 외면하고, 홀대하고, 핍박하고, 착취하는 이 세상을 두고 차마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모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엉망진창임에도 우리가 미련스럽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무릇 모든 숨탄 것들의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고 싶다.
그 절대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고통이, 이처럼 자주, 이처럼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생활고로, 우울증으로 세상에서 고립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잘 살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현대인에게 있어 자살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사회 문제다.
그 사회경제적 손실을 떠나 우리 주변의 다정한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증발함으로써
그의 부재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누군가의 가족과 이웃이자 같은 시민으로서 우리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살을 막으려는 수많은 대책과 구호가 난무한다.
그러나 생을 포기하려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밖에서 보기에 별 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유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듯,
보잘 것 없는 작은 것들이 또 누군가를 살아있게 만든다. 삶과 죽음은 불가해한 것이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재판장 판사 박주영
판사 김동석
판사 황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