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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 김어준-이재명 100분 인터뷰 전문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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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경선을 준비하던 2021년 6월. 월말 김어준에서 대담을 진행했었지요. 그 내용도 좋았지만 텍스트로 읽으면 더 좋겠다 싶어서 일일이 들으며 정리했던 자료입니다. 종종 재업해왔는데, 총선을 앞두고 우리가 응원하는 이재명 대표의 삶을 아직도 모르는 분들 밭갈이용으로 쓸만하지 않을까... 싶어 다시 올립니다. 반응이 좋으면 계속 재업할...지도 모르겠네요^^;;

+) 2024년 3월 26일 겸뉴공에 이재명 대표 출연한다 하니 미리 읽으셔도 좋을 것 같아 재업합니다~


 

(편집자 주 :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김어준 총수가 월말 김어준 6월호에서 진행한 이재명 후보와의 인터뷰 전체를 받아 썼습니다. 

물론 팟캐스트로, 유튜브로 공개되어 있으니 그걸 들으셔도 되는데... 

김어준이라는 이유로 듣기조차 거부하는 분도 있을 수 있고, 거의 100분이나 되는 길이를 다 듣고 기억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텍스트로, 글로 읽으면서 접하면 한 분이라도 더 이재명을 이해하고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 108배나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제 나름의 108배를 하는 심정으로 적어 보았습니다. 

이게 받아쓰기 앱으로 하면 한계가 있어서, 편집하다보면 도로 그 시간이에요ㅎㅎ

모쪼록 이재명을 잘 모르는 유권자분의 현명한 선택에 도움되는 좋은 정보가 되기를 바랍니다^^)

+

공백이 전혀 없는 꽉찬 대담이다보니 분량이 장난 아니죠... 

스크롤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일단 이렇게 통으로도 올리고 각 파트별 색인 링크는 아래에 덧붙입니다^^

 

1. 이재명의 성장 스토리. 출생에서 변호사가 되기까지

https://www.ddanzi.com/free/724164225

2. 이재명의 연애와 결혼 

https://www.ddanzi.com/free/724411618

3. 변호사 이재명. 정치를 시작하기까지

https://www.ddanzi.com/free/724505976

4.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재명. 그의 판단기준과 진심

https://www.ddanzi.com/free/724514661


 

<1부. 어린 시절과 변호사가 되기까지>

(처음~47:20 까지)

 

월말 김어준의 김어준입니다.

오늘 인터뷰 시간입니다. 이재명 지사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반갑습니다. 

오늘 이제 정치 정책 이런 얘기 말고, 자연인 이재명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자연인 이재명. 사람들이 잘 몰라요

제가 사실은 얘기를 잘 안 했어요.

아는 얘기라고 해봐야 "점이 없다"

피부가 무죄다(으하하하하)

저도 저걸 온몸을 다 찾아봤는데 혹시 어디 있나 했더니 점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아, 어딘가에 있긴 있어요?

네. 가르쳐주면 또 누가 써먹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 피부로 무죄 받은 최초의 정치인. 제가 어디서 태어나셨나 자료를 찾아봤더니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

와...어떻게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발 더 들어가거든요. 

지도도 찾아보고, 사진도 찾아보고 영상이 있나 찾아보고... 찾아봤는데

그냥 시골이 아니에요!

맞아요.

여기 그냥 시골이 아니라 굽이굽이 계곡을 타고 들어가지고, 계곡 산골.

네. 산 꼭대기입니다. 

아직도 개발이 안 돼 있더라고요

아직도 찻길이 없어요

이게 대한민국에 얼마 안 남아 있는 오지에요 오지.

하하...맞습니다.

내가 하도 깜짝 놀라서, "뭐야 이거? 집이 어디 있었다는 거야 여기!" 이랬어요.

그게 어느 정도 오진인지 감이 안 올 수 있는데,

저희가 부모님 산소, 조부모님, 증조부모린 산소가... 이제 삼대를 모시니까요. 

추석 때 한식 때  꼭 가는데. 우리 형제들하고 조카들하고.

아버님 어머님 산소는 봉화군에 있고요. 증조부 증조모님 산소도

거기가 3개 군이 겹치는 지역이더라구요.

네. 그 다음에 할머니 산소는 안동군에 있고, 할아버지 산소는 영양군에 있어요. 

근데 그게 하루면 다 돌아요.

어떻게 3개군을 다 도냐? 그게 오른쪽은 영양, 왼쪽은 봉화 중간에는 안동 이래서

이 꼭짓점. 그러니까 산을 경계로 한 3개 군 그 산 꼭대기 지점이라서

 

그러니까 강원도 화전민 얘기 할 때 주변에 화전이 있고 집 한두 개 있는데 그런 분위기더라구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살았나... 농사 해봐야 밭뙈기 조금밖에 안 되겠던데, 그쵸?

지금도 이제 한 분이 귀농하셔가지고 네 집이 살아요.

네. 총 4집. 네 집이 살고 거기 버스가 안 들어와요.

아, 내가 본 게 전부구나ㅎㅎㅎㅎㅎ

네. 주민을  다 합치면 아마 한 8명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 사진과 영상을 찾아봐도 산골이에요. 

그렇습니다.

거기 뭐 할 게 있다고 부모님이 그리로 가셨어요?

아 원래 거기 사시던 분들이세요.

야...

제가 그 지통마라고 하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 집터가 아직 남아 있어요. 

지금 뭐 텃밭을 누가 쓰고 있던데, 제가 매년 한 두 번씩 꼭 갑니다.

부모님이 거기서 농사 지으셨어요.

농사지으셨죠. 자실 이 얘기하지 말라던데. 저희 가족들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야, 뭐가 좋은 거라고 그러면서?

네. 뭔 좋은 얘기를 자꾸 하냐

오늘은 그런 얘기만 해요. 딴 데서 안 하는 얘기

그러니까. 그 인생들이 사실 해방 직후에 다들 어려웠잖아요?

말 안 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사실 그 있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해방 후에 그러니까 한때 유행했던 게 뭐냐 하면

'도리짓고땡'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아 노름...ㅎㅎ

네. 다섯 장 딱 주고 세 장 가지고 10짜리로 맞추는 거

난 해방 이후 하길래, 또 뭐 역사적인 거대한 이런거 나오나 했는데, 해방 이후에 노름ㅋㅋㅋㅋㅋㅋ

대대적으로 유행했어요. 온 동네가

네 가군데 무슨 온 동네에욬ㅋㅋㅋ

아니 그 아랫 동네도 있고 그러니까^^;; 그때 온 동네 사람들이 밤에 다 노름은 한 거에요.

하긴 할 게 뭐가 있겠어. 이해 가요.

에. 그러니까 할 게 그거밖에 없는 거지. 그런데 우리 아버님도 어쨌든 그런 것도 좀 하시다가,

조그마한 밭뙈기 있던 것도 없어지고. 결국 어머니하고 아버님은 상경하시고.

그러니까 거기서 제대로 사셨는데 아버지가 이제 해방 이후에...

대유행을 따라서ㅎㅎㅎ

해방 이후에 빨치산 이런 거 나올 줄 알았더니 "해방 이후에 도리짓고떙ㅋㅋㅋㅋㅋㅋ"

마을 주민과 함께 심취하셔가지고 작은 전답을 날리셨다.

저희가 그걸로 충분히 먹고 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간신히 거기서 터전을 유지하며 계속 살다가. 언제까지 거기 사셨어요?

제가 76년까지 살았죠. 76년에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제 졸업을 기다려서 성남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런데 거기 학교 부지랑 있을 공간이 없던데 어디로 다니셨어요?

거기서 6km 정도 산길을 걸어서 내려오면 삼계초등학교라고 걸어 다녔죠.

저도 시골에서 살았거든요. 양산 철마산 산기슭에서 자라서,

산기슭에서 사는 아이들이 뭐 하는지 압니다. 

그러니까 칡 캐고 개울에서 가지 잡고, 산딸기, 개구리 잡아 먹고 꿩 잡고 그런 거 하잖아요?

그럼, 학교 안 가지 그래서 내가 한번 보여드렸는데, 제가 결석이 되게 많아요. 

제 나이 여섯 살 때인데 6km를 걸어가지고. 가고 싶은데 징검다리가 잠겨 못 가는 거예요.

ㅋㅋㅋ그럴 때도 있고.

아니 주로 그렇다니ㅎㅎ

정말 엄청나게 눈보라치거나 이러면 갈 수가 없어요. 

그것도 그렇고, 날이 너무 좋으면 또 이제 멱감아야 되고 애들 놀아야 되고

개구리 잡아 먹어야 되고 중간에. 뒷다리 구워드셨죠?

아 많이 먹었죠. 우리는 잡아가지고. 요새는 그거 없는데 오염이 돼서

징거미 잡아서 그걸 바위돌 위에다 딱 올려놓으면 이게 빨갛게 익어요. 

아침에 가면서 잡아가지고 얼른 바윗돌에 올려놓고 돌아올 때 쪽 뽑아먹는 거죠.

그리고 칡 캐서 입가심하고ㅎㅎ

더덕 캐 먹고... 혹시 복숭아 삶아 먹어보셨어요?

복숭아는 삶아먹어보진 않았죠.

이 복숭아를 모두가 다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누군가 따 먹는 거죠.

익기 전에, 먹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따 먹어야 되는데...

이 씨도 여을지 않은 사태에서 먹으면 쓰고 독해요. 독기가 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삶아서 먹어보니까 쓴 맛이 조금 빠지더라고ㅎㅎㅎ

저희가 7남매니까 대개 두 살 터울이었고.

학교는 이제 셋이서 넷이서 졸졸졸졸 이렇게 키대로 같이 다녔습니다. 

가끔씩 가다 보면 둘째 현님이 "야 이거 뭐 굳이 가냐"

그럴 때가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자체 원격 수업ㅋㅋㅋ

그리고 이게 학교에서 비가 많이 오면 오지 말라고 그러거든요?

비가 조금 오면 맨 먼저 간 큰 형들이 먼저 가지.

저 앞에 지키고 있어요. "다 되돌아가". 왜냐하면 자기만 안 가면 변명이 안 되니까.

비가 얼마나 많이 왔냐는 자기들이 결정하는 거지

에. 저 아랫동네에서는 알 수가 없죠. 그리고 겨울에는 예를 들면 꼭 징검다리에 물을 뿌려놔요.

검정고무신을 신고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게. 다 얼어가지고.

그러면 또 못 가는 거죠. 못 갈 이유가 이렇게 너무 많아요.

날씨 좋으면 또 못 가^^

 

자...그렇게 이제 불성실한 학생으로 초등학교... 즐거우셨겠네요. 진짜.

전 진짜 즐거웠습니다.

저도 어릴 때 기억 완전 즐겁거든요.

도랑에 그 돌 들어가지고 가재 잡아서

그때 가재는 좀 싸구려였고 징거미. 징거미가 진정한 물고기인데.

저희는 오솔길을 이렇게 산길을 걸어 다녔기 때문에 그런 추억들이 있어요. 

그때 당시 어릴 때는 아침에 이슬에, 나뭇잎들이 젖어서 이렇게 길을 막아요. 축 쳐져서.

그 밑을 기어 지나다니고 하는데, 노란색 빨간색 단풍잎이 정말로 선명한 색깔에 흠집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 기억들이 있구나

네 정말 이렇게 손으로 꽉 잡으면 물이 쫙 떨어질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자 아름다운 얘기 그만하구요ㅋㅋㅋ 

뭘 아름다워요~~

지금 촌이라고 하면 집이 그래도 한 20몇 채 있고 그런 데를 상상하기 좋은데 보니까,

그게 아니라 오지야 오지

요새 왜 자연인 이런 거죠. 그런 거 해도 됩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해방 이후에 유행하던 도리짓고땡 때문에 작은 밭을 날리시고... 어디로 나오셨어요?

성남으로. 그때 철거민들 모여서 살 때니까.

그래서 성남시장으로 출마하셨구나!

가다 보니 그래 됐어요. 성남으로 가시고, 이제 어머니하고 우리 형제들 형제들은

남의 밭 농사도 지어드리고 산전도 일구고 그렇게 살았죠.

제가 졸업하는 걸 기다려서 성남으로 다 이사 왔죠

성남에 이사 오셨을 때가 이제 중학생 될 때네요?

그렇죠. 졸업하고 며칠 있다 올라왔어요. 2월 말에

그러면 12살 3살 때 올라와서 뭐 하셨어요?

 

그때 당시 6개월짜리 월세였는데, 저희가 살던 상대원동 뒷골목에 목걸이 만드는 공장이 있었어요. 

목걸이를 어떻게 만드냐면 "신쭈"라고 하는 걸 휘어가지고 모양을 만든 다음에 납땜을 하거든요. 

연탄을 이렇게 피워놓고. 연탄 위에 납을 끓여요.

그럼 납의 김이 살살살 올라 펄펄 끓여서 액체가 되면

이따이이따이병 걸리는데...

그렇죠. 그거를 납땜해야 되니까 염산에 싹 담가가지고, 납에다가 넣었다가 손으로 잡고.

엄청 뜨겁죠 싹 꺼내면 식잖아요. 그 작업을 제가 했었죠.

 

학교는요?

못 갔죠ㅎㅎㅎ

아 아버지가 "야 너 학교 가지 말고 돈 벌어" 이렇게 된 거에요?

아니 갈 형편이 못 됐어요. 진짜로.

제가 지사님하고 얼마 차이 나지 않은 세대라...

그때 다들 어렵긴 했어도 중학교까지 안 보낼 정도는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형제들이 워낙 많았고요. 7남매가 됐고. 정말로 가진 게 너무 없어가지고.

어머니가 예를 들면 뭐 막걸리 빚어 파시고, 얻어다가 애들 먹일 정도로 심각하게 어려워서.

그런 데다가 애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중학교부터 학교를 못 갈 경우는 그때도 흔치 않았는데

근데 제가 그때 성남에서 본 거는 성남에 있는 공장에 가니까요, 다 제 또래더라고요.

학교 못 가고 나오고 있는 중학생 또래들

그러면 그 성남 올라와서 처음에 학교로 간 게 아니라 공장을 가신 거네.

그러죠 뭐.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제가 매우 가슴 아픈 게 이제 그런 거죠. 어머니는 저를 공장으로 데려가 주셨지 학교에 데려다 준 게 아니고.

손 잡고 입학식하러 간 게 아니라

공장에 데려다주고 어머니도 일하러 다니시고 화장실 이런 거 하셨으니까

어머님 화장실...

화장실 입구에 왜 옛날에 돈 받는 게 있었어요. 

작은 거 10원 큰 거 20원. 화장실 청소하고 휴지도 팔고 그러셨으니까.

이게 형편이 어려웠던 수준이 아닌데요.

완전 빈민이었죠. 산간 빈민에서 도시 민민으로. 

 

그리고 참 그때는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막 세상에 활기가 넘치던 때잖아요?

아마 고도성장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조그마한 목걸이 공장을 다니다가... 하루에 100원인가 받았던 것 같은데,

하루에 300원 준다는 데가 있어가지고 그 공장으로 옮겼어요.

그래도 나름 그 경험이 있으니까 목걸이 공장으로.

사실 제가 노동착취를 당한 거죠. 

원래 300원 줬어야 되는 건데 100원짜리로 착취당하고 있다가 깨달았구나. "이거 내가 당하고 있구나"

그 당시에 동네 동네에 "공원 모집"이 많이 났었어요. 

300원 준다는 곳이 있어서 그거 보고 이제 창곡동이라고 하는데 이제 갔다가.

어느 날 그 주인이 야반도주해가지고 석 달 짜리 말고 떼먹혔어요.

쓴맛을 또...

그때는 8시간 근무도 없고 제가 9시에 끝났는데, 9시에 끝나면 또 터덜터덜 걸어오잖아요. 

3km 거의 1시간 가까이. 애 걸음이니까. 그때 동네 전파사 있는 데서 TV뉴스 이런 걸 틀어놓잖아요?

MBC인 걸로 기억하는데 9시 25분에 "오늘의 가곡"인가 뭐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 시그널 음악이 "내 마음은 호수요~" 그게 호숫가의 가수가 이렇게 버드나무 자꾸 흔들면서. 기억나요?

저도 기억나요.

그 생각이 요새도 있어서 가끔 내 마음은 호수요~하고 내가 불러봅니다.

 

남들이 중학교 다닐 때 공장 다니신 거예요. 그다음에 무슨무슨 공장 다녀보셨어요?

그 다음에는 고무공장. 동마고무라고요

다 호흡기에 안 좋은데

왜냐하면 제 그런 데밖에 안 뽑지, 좋은 데를 뽑겠어요?

거기를 그해 연말쯤 겨울에 제가 갔는데, 그때가 제일 어려웠을 거니까

거기는 맨날 야근 철야를 시키는 거예요. 애들은 새벽 2시까지

라면을 한 개씩 주는 거예요 생라면을.

그때는 무지하게 고마웠어요. "라면까지 주시네" 이렇게 생각하고.

나중에 보니까 저녁을 줘야 되는데 라면으로 때운 거더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거기서 벨트에 손이 감겨가지고 중상을 입었었죠.

그 때의 고무가루가 지금 남아 있습니다. 까맣게 보여요 손톱 밑에.

근데 그때 제가 배운 노래 하나 있죠. 그래서 제가 그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그때 하남석의 "밤에 떠난 애인"이 유행했어요. 나보다 나이 두 살 어린 애가 저한테 가르쳐 겁니다. 

걔는 초등학교를 안 다닌 애였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다쳐서 치료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집에 가라고 그래서 집에 가 있으면 월급을 안 주더라고요.

그래서 월급 받으려고 왼손을 이렇게 들러메고 한 손으로 일을 하러 다녔어요. 

그때도 어머니가 되게 안타까워 하셨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그런데 장애를 얻으신 걸 무슨 일을 하다 그러신 건가요?

그 다음에 이제 이 회사가 또 망하고. 그때는 고도성장기라 많이 망하고 새로 생기고 그랬는데.

공장 용접 시다를 하다가 그것도 망해서 야구글러브 만드는 공장의 프레스공이 됐어요.

아 프레스에 찍혔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눌려서 눌렸는데 뭐 잘리지 않고 다행히.

치료를 했어야 되는데 그냥 안 하고 아픈데 그냥 계속 일하다 보니까.

회사에서 치료해 주는 것도 아니고 산재라는 개념도 아예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성장판을 훼손당해서 한 2, 3년 이상 지나니까요. 

갑자기 키가 쫙 자랐는데 팔이 어느 순간에 보니까 비뚤어져 있더라고요.

뼈 두 개 중에 한 개는 이제 안 자라고 하나만 자라니까 이게 비뚤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장애등급을 받으신 거구나.

그거 하고 이 그다음에 저석공이라고. 시계 문자판 위에 시침 가르치는 판 있잖아요. 그거 깎아내는 일을 했었는데.

그때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합니다 라카. 고립된 방 안에서 락카칠하고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하고.

이러려고 자원을 했는데 거기서 후각이 한 60% 날아갔죠.

몸이 엉망이네아니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제 공장에 들어가서

한 1~2년은 다들 그런가 보다 하지만 깨닫게 되잖아요?

내가 지금 학교 가고 싶은데, 이 공장만 다니고 있는 게 한탄스럽고 억울하고.

부모님한테 아버지한테 학교 보내달라고 안 그러셨어요?

 

저는 그게 뭐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살던 데가 도시 빈민 동네였기 때문에

공단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십 평짜리를 네다섯 가구가 살고 이러다보니까,

방 한 개에 일곱 명 살고 이러니까요.  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뭐 당연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제가 어느 날 번쩍 깨달은 거예요. 아침에 공장으로 작업복 입고 이렇게 가는데,

사춘기가 되니까 여학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거예요. 이쁘잖아요.

그런 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죠.

교복 입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나는 공장으로 그 애들은 학교를 가니까 반대 방향인 거 스치게 되잖아요. 

그때 내가 번뜩 생각이 들어요. 난 뭐지?

한 중학교 2학년 쯤 나이죠.

어느 순간에 그 느낌이 들었죠. "나도 공부를 해야 되겠다"

산골에 살 때는 공부라는 개념도 없었고

여학생들 못 하니까 나 공부해야겠다. 처음으로.

나는 뭐지? 했던 거죠. 이제 검정고시 4과목을 봐야하는데

그 형편에 방법은 검정고시죠.

 

그렇죠 그거밖에 없죠. 하여튼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원래 검정고시가  4월 8월, 1년에 두 번 봐요.

제가 한 5월부터 시작해서 8월에 붙었는데, 제가 그래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머리는 좀 있었네

아 머리가 아니고. 그 검정고시가 특성이 있는데, 40점 이상이고 평균이 70, 60점 이상이면 전부 합격이에요. 

근데 60점 이상은 과목 합격을 시켜줘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떨어진 과목만 보면 돼요. 

제가 야간 학원을 등록을 했는데 영어가 어쨌든 한 달 진도가 나간 거예요.

우리는 ABC도 모르는데, 그래서 제가 이걸 딱 포기했어요. 

"나머지 일곱 과목만 합격하고 영어는 나중에 보자" 했는데,

제가 시험 보러 rk는데 우리 학원 선생님이 한 수 가르쳐주셨습니다. 

"재명아.  답은 다가 많다. 그리고 긴 게 답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만고의 진리 아닙니까? 그 때 4지선다였거든요.

아 전혀 모르니까 "가, 다 다 다 다. 나,  다다다" 그중에서 다 다만 하 좀 좀 쑥스러우니까

긴 답이 있으면 골라가지고 한번 찍고 나머지는 다. 이렇게 했는데 놀라운 기적이 발생한 거죠. 42.5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낙제점을 2점 넘겨가지고

확률상으로 25점만 받아야 되잖아요. 선생님 말이 맞은 거죠. 42.5점으로 합격을 해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78년 8월에 통과했죠. 그래서

그러면 중학교 2학년 때 통과한 거네요. 오히려

그리고 나서 계속 공장에 다니셨어요?

그래서 계속 공장을 다니는 거죠. 그런데 공장을 들어가니까 또 군사적 문화가 공장 안에 있는 거에요.

관리하는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관리를 하는 거에요.

학교에서도 군복 입고 싶었죠 그때는.

그랬다면서요. 학교를 안 다녀서 몰라요 우리는. 군복은 대학 가서 교련복 처음 입었으니까.

공장을 가니까 그 어린 애들 줄을 세워놓고요, 아침에 출근하면 빠따를 치고, 퇴근 전에 빠따를 쳐서 집으로 보내는 거예요.

군기 잡는다고

뭐 당연히 일하다면 또 심심하면 때리고, 또 성질나면 때리고. 내가 보니까 스포츠였어.

그러다가 애들끼리 싸움 시켜가지고 뭐... "야 부라보 콘 내기. 진 놈이 사라" 갈취 당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거 시키는 사람을 연구를 했죠. "야 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대리 직함을 달고 우리를 때리지?"

봤더니 고졸이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눈이 번쩍 한 거 아닙니까!

아, 중졸 가지고 안 되는구나. 고졸 돼서 반장 돼야지!

그런 거예요. 나도 맞지 말고 좀 살아봐야지. 그때 생긴 꿈이 검정고시도 고졸이 가능하니까.

고졸 자격증을 따면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공부 시작했어요.

영어를 안 배웠으니까 이제 단과 학원에서 영어 공부하고 수학 보충하고 해가지고.

다시 80년 4월에 대입 합격을 한 거예요. 고등학교 자격 검정고시를. 

근데 해봤더니 아무 필요가 없는 거야 이게. 소용이 없잖아요. "너 관리자 해라"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때 대학 간다는 건 아예 꿈도 못 꾸고

그래도 제가 공부는 계속했어요.

 

왜요? 본능 같은 겁니까?

본능이 아니고 확신 때문이지.

어떤 확신이요?

제가 태어났을 때, 돌 지난 다음에 우리 어머니가 점쟁이한테 물어봤어요. (ㅋㅋㅋㅋㅋ)

물어봤는데 "얘가 반드시 성공해서 당신 호강한다" 이렇게 얘기를 해줬대요.

우리 어머님이 사실 아홉 남매를 낳았는데 저를 낳고 난 다음에 생일을 잊어버리신 거예요.

저를 낳은 나를. 근데 어머니는 물론 부정하셨죠. "내가 알지만 한 번 확인차 물어봤다" 이렇게 주장을 하세요.

근데 "그거 확인차 물어보시는데 뭐할라고 겉보리 한 되를 갖다 드렸습니까" 그건 증거가 안 됩니다"

내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음력 22일인지 23일지가 헷갈리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경상도 말로 "점바치"한테 가서 물어본 거예요.

점바치가 그랬다는 거예요. "얘는 23일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머님이 그때 그 시절에는 달력을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죠.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하니까.

그런데. 저는 그때 이 점바치라고 하는 게 밭인 줄 알았습니다. 

그 만화를 애들은 믿잖아요? 어릴 때 밭이 말을 해줬다고 상상을 했어요.

아 그러니까 자연이 어머님한테 말을 걸어서

"야를 잘 키우면 당신 호강한다". 그래서 어머님이 그 얘기를 그때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심심할 때마다.

생일 기억 못해서 미안해서 하는 말인데ㅋㅋㅋ

그렇죠. 나중에 좀 철이 들어서 생각을 해보니까, 23일이 된 이유는

23일이 사주에 맞춰 보니 22일보다 나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사주가 엄청나게 잘 나옵니다. (크하하하하하핳)

평생 생일을 잘못 알고 계실 수도 있어요. 

그 점장이, 어느 순간 그게 떠오른 거예요.

그렇죠. 겉보리 한 되 주니까 말을 해줘야지.

그리고 아마도 장부에는 22일이라고 써놨을 가능성도 있어요. 

"네 아들입니다"라고 얘기하고 장부에는 딸입니다. 딱 써놓은 다음에 나중에 항의하러 오잖아요. 

"이거 내 딸이라고 그랬는데 내가. 봐봐요" 이러는 식으로.

어쨌든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언젠가는 뭐가 돼" 그런 확신이 있었어요.

아 어머님의 그때 암시가 어린 아이 이재명이에게

그러니까 소위 무한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거죠. 불가능한 도전을.

예를 들면 대학 가려는 생각이라든지

집안 형편상 도저히 안 되는데 공부를 계속하는 거야. 이유는 몰라.

뭔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요.

그 시점에 할 수 있는 건 그거이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별게 없기 때문에.

성공을 할 수 있는 길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래도 실력을 키워야 된다

 

그러다가 대학 가기로 한 건 언제에요?

그게 제가 참 오해받는 건데 "저 사람이 전두환 장학금 받고 대학 갔다"는 공격이 있어요. 

제가 실제로 전두환으로 말미암아 대학을 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요?

전두환이 80년에 쿠데타를 했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뭘 했냐 하면 본고사를 폐지해버렸어요. 

그 다음에 과외 금지시켜버렸잖아요. 

그래서 오로지 학력 고사만으로 전 수험생을 65만 등에서 1등까지 줄을 쫙 세운 다음에,

오로지 그것만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하죠. 

그러다가 81학번부터 뭐가 생겼냐면 "인문계 몇 등 안에는 등록금 면제하고 생활비 한 달에 20만 원 줌"

뭐 이런 게 생긴 거예요. 대학 장학금, 등록금 면제에 학비 보조금"

"바로 이거다. 저거면 나 갈 수 있다" 이렇게 된 거죠.

그때 제가 월급이 한 달에 한 6만 원 좀 넘는 정도였는데,  한 달에 20만 원씩 준다는 거죠. 

학교를 그냥 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거 아니에요.

완전히 인생 역전. 돈을 더 벌 수 있어!

제가 그래서 야간 학원을 등록해가지고 학력고사 학원을 다녔습니다.

딱 갔는데 매달 입시학원은 평가 시험을 그때 봤잖아요. 전국모의고사

우리는 최하 3천 등 이내에 들어가야 돈을 받고 갈 수 있는데. 좀 액수를 많이 받으려면 1500둥 안에 들어야 하는데.

3월에 가서 시험을 봤는데 40 몇만등이 나온 거에요ㅋㅋㅋㅋㅋㅋㅋ

처음으로 전국 모의고사에 봤는데 40 몇 만 등을 했다.

그래도 제가 또 믿는 게 있잖아요. 점바치의.

나중에 사람인 걸 알았지만 "가능하다" 이렇게

토템이 낳은 이재명이네.

맞아요. 제가 이것 때문에 초등학생들 시장실에 놀러 오면요. 

꿈이 뭔지를 말하게 해가지고 다 사인해가지고 "꼭 과학자 되세요. 꼭 건물주 되세요" 내가 다 써줬어요.

이게 주는 암시 효과가 너무 크다는 걸 그때 체험한 거예요. 

지금도 대학 다니는 학생들이 저한테 연락와요. 다시 써 달라고.

왜 잊어버렸어요? 했더니 "사실은 아버지가 쫙 찢어버렸어요" 이래요ㅋㅋㅋㅋ

아, 아버지가 국민의힘 지지자!

내가 너무 아쉬워서 도지사 돼가지고 많이 써서 우편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어린이들한테는 "하지마, 너 나빠, 너 큰일 낼 놈이야" 이런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 다시 돌아와서요~

3월에 40 몇 만 등을 받고 나니까 "내가 이렇게 실력이 없나"

그런데 다음 달에 시험을 보니까 10만 등이 올라갔더라구요. 재미있더라고. 그 올라가는 느낌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7월까지 다니다가 그만둬버렸어요. 학원을.

왜요?

퇴근해가지고 버스 타고 갔다가, 그 버스 타는 시간이 아까워요.

그 시간에 그냥 내가 그냥 독학하자

가르쳐주는 게 없더라고 내가 보니까

건방이 하늘을 찔러가지고

제가 원래 검정고시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공장을 그만뒀어요.

아버지도 동의하시고. 애틋하니까.

다 컸으니까 이제 알아서 해라.

10월 시험에는 천 몇백 대까지 갔어요.

서울대 들어갈 실력인데 이 정도면.

그리고 독학을 혼자. 그냥 독서실에서 밤새고 공부하고 이랬는데.

최종적으로는 어쨌든 등록금을 면제하고, 한 달에 20만 원을 주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정도가 돼서 대학을 갔죠. 

그래서 전두환 덕에 간 거예요. 결국 뭐 내가 그 인간한테 속아가지고 광주 욕했다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그래서 내가 내 인생도 바꿨지만.

 

그래서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없으셨네요.

제일 아쉽죠. 사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제일 도움 되는 존재가 고등학교 동창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 47명.

그때 그 시절에 공장 같이 다녔던 친구들 연락하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동문이 없기 때문에 공장 동문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공장을 제가 2년 넘게 다녔는데, 그 오리엔트 공장에 같이 다녔던 그 또래 지금도 모임을 합니다. 

그리고 저번 시장 선거 때도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10대 시절 공장에서 같이 보냈던 평생 친구죠. 지사가 됐든 말든.

지사님도 그 양반들하고는 마음 털어놓는 거 아닙니까.

그러죠 "야 새끼야 저 새끼야"하고 그러는데

근데 10대 시절 그러면 삐뚤어질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 점쟁이 때문이라니까요^^ "나는 분명히 뭔가 잘 돼" 그런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근거가 하나 더 있어요. 거기는 주된 근거고 부수적 근거가 하나 더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막걸리 빚어 팔았다고 그랬잖아요?

그 손님 중에 한 사람, 먼 친척이 저를 볼 때마다 "야 얘 귀가 말이야 이거 부처 귀다"

진짜 터무니없닼ㅋㅋㅋㅋㅋ

터무니있어요. "야는 귀가 잘생겨가지고, 너는 그 크게 될 놈이네" 이 얘기를 몇 차례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만큼 기댈 데가 없었던 거예요. 내 존재를 인정해 주는 기대.

하찮은 근거도 근거가 되죠.

절절하게 매달린 거죠.

 

 

제가 공장에 다니면 회식을 많이 합니다. 

회식을 하면 애고 어린이고 술을 마셔요

거기는 특별한 윤리가 있겠어요?

다 술 먹고 뭐 폭력 사건도 많고, 여공을 어떻게 했다느니 완전 아사리판이었는데

정글이죠 정글.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프고 안타까운데, 그때 이제 회식을 가도 제가 술을 안 마셨어요. 

아, 나는 밭이 말해줬어!

제가 일기장에 그게 있어요. "술 먹고 담배 피우면 머리 나빠진다"

그래서 아직도 담배를 안 하시는구나.

지금은 왕창 피우죠. ㅋㅋㅋㅋㅋㅋㅋ

고등법원 유죄 판결을 받고 난 다음에.

 

아니 근데 갑자기 점프하자면 대법원에 걸려 있을 때 "밭이 거짓말했나 보다"

망이 망소이 있잖아요? 그게 너무 공감 가는 거예요. 

나 진짜 진격도 못하고 여기서 참수 당하나 보다. 근데 점바치가 그랬어. 

그래서 딱 두 개 있는 거 아닙니까? 하나는 밭 하나는 귀.

그러다가 왜 사시를 봐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또 다른 결정인데

매우 단순한데요. 하여튼 대학을 선택한 기준은 안전하게 학점 제한 없이 생계비를 계속 지원하는 것.

한양대는 많이 주긴 하는데 3.5 이상을 넘겨야 된대요.

그리고 가서 과를 골라야 하는데,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데를 고른 게 법대였어요.

그러니까 첫째 장학금을 안정적으로 주는 거, 둘째 내 점수가 너무 아까우니까.

그러면 법대가 됐구나. 그때 경제학과가 높았으면 경제학과로 가는 건데

당연히 그렇죠. 의대를 갈 수도 있는데, 의대는 뭘 더 내야 해요. 돈을 더 내라고 해서 거긴 배제.

선배들이 우리를 모아놓고요. "이 사람이 뭐 고시를 합격했대" 해서 고시가 뭐지?

사법고시라고 하는 걸 보면 판검사 변호사가 될 수 있고 어쩌고 하더라구요.

"어 저런 게 있었어?" 그래서 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법고시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 그때 가서 사회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아니 일단 헤엄쳐서 나오는 게 바쁜데 지금 당장을 일단 넘고 봐야죠!

일단 공장에서 담장을 넘어서 대학교를 갔더니 어, 사법고시가 있어!

공부머리가 있으셨네요. 빨리빨리 공부하셨네요. 

사법고시도 보니까 4년 만에 되신 거 아니에요. 

4학년 졸업하면서 됐죠.

아니 그런데 사실은 지금하고는 달랐죠. 

한 해 300명밖에 안 뽑았으니까 진짜 어려웠지.

근데 그것도 제가 좀 운이 좋았던 게, 그전에는 한 120, 130명밖에 안 뽑았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을 들어가기 한 3~4년 전 그때부터 300명이 된 거예요.

300명도 적은 거죠. 전국 300등만 뽑는 거니까

그래서 제가 3학년 때 1차 시험 됐다가 4학년 때 2차 시험 떨어지고요. 5학년 때 이제 졸업하면서 동차합격했는데...

아마 제가 4학년 때 됐으면 세상 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을 겁니다. 

내 개인적 기억을 길을 갔을 가능성이 많아요.

1년 더 공부를 하면서 철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때 이제 아버지한테 도움을 받은 거예요. 처음으로.

왜냐하면 장학금이 안 나오니까.

저하고 많은 갈등을 있다가 돌아가신 우리 셋째 형님. 제가 대학에서 장학금 받아서 학원비 대 드리고

생활비 해드려서 같이 대학 갔거든요.

20만 원을 받았으니까 집에도 한 5만 원 드리고 형님 학원비도 대주고 교통비용을 생각해야 하니까.

그러고 있었는데 사람이 떨어졌으니까 장학금은 없고. 그걸 끌어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때 이제 아버님도 모아놨던 돈으로 저를 이제 고시원비 대주시고.

우리 셋째 형님도 그 형님이 받은 장학금으로 저를

아 그러니까 그때 받았던 장학금으로 형은 결국 공부에서 대학을 갔고

그 형이 또 장학금 받은 걸로 또 이제 동생한테 해서 그걸로 공부를 해서 이제 합격을 했는데.

그 때가 딱 1987년. 사회 대격변기였어요. 저한테 미친 영향이 너무 커요. 

사법연수원에서도 맨날 뭐 돌 던지러 다니고. 그 미도파 앞에 맨날 뭐 돌 깨서 던지고 그러고 다녔으니까.

그때 제 생각이 아주 확고하게 바뀌어서 제 인생 좌표가 바뀌는데 크게 도움이 됐죠.

 

그때 사법연수원에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와가지고

노동법학회 강연 오셨었죠.

그 양반은 그 시절에도 보통 사람하고 좀 달랐는데.

그렇죠. 그분은 좀 정말로 특이한 인생을 사셨잖아요?

판사 잠깐 하다가 나와서 등기사무 하시고. 변호사들 원래 안 하는 거예요.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점에서 닮았죠.

주류 세력도 아니고 아웃사이더인데. 이분이 노동 운동하시고 격렬하게 현장에서 자우시던 인권변호사.

종류가 완전히 달랐죠.

그분이 와서 저희한테 강연한 내용 중에 하나가 이런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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