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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 관련 증언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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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한강 인도교 폭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6.25 전쟁에서 국군과 경찰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였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역시 2014년 이전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2014년 발간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pp. 71–74)[38] 그리고 2016년 발표 소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pp. 6–7)#[39]# 에서 재조사를 통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사망자 중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알려진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기록은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증언 형태로 전해진 자료만 존재할 뿐 어떻게 500~800명의 추정 수치가 산출되었는지에 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고 조사를 통해 산출한 사망자 수치 등과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 수치가 아니다. 그리고 500-800명의 사망자를 전부 피란민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며 군인관 민간인을 모두 합한 추정 수치인데 어느 순간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 확정 수치처럼 확대·재생산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 등의 증언이 어느 순간 실제로 조사를 해서 발표된 이론의 여지없는 신뢰할 만한 사망자 확정 수치처럼 그리고 이 사망자들의 신원이 전부 피란민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2) 고든 L. 로트먼(Gordon L. Rottman)의 2006년 저서 '인천 1950(Inch'on 1950)'에 수록된 사진과 설명을 보면 당시 한강 인도교는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파괴공작원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란민의 한강 인도교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고 인도교 옆의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다. 한강 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며 관련 증언도 남겼다.#


위와같이 피란민의 한강 인도교 통행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통제 활동으로 용산의 육군본부에서 폭파 지휘부가 있던 노량진의 남한강파출소에 직접 방문하여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려던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조차 중지도에서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로 폭파가 예정된 중지섬과 강남 사이 다리 구간에 진입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수많은 민간인들이 마음대로 진입하여 건너다가 폭사했다는 사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저서와 소논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1964년 최창식 공병감 재심에서 당시 폭파 작전을 수행했던 이창복 대령(당시 중위)는 폭파 직전 다리 양쪽에 교통 정리 임무를 맡은 병사들을 배치하여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증언#을 하였고, 목격자 이창녹 소위는 폭파 10분 전 다리 위의 차량과 인파를 빼내고 더 이상 진입하지 못 하게 강력한 통제 때문에 차량 대열이 멈추고 공백이 잠깐 생겼는데 이때 폭파 지점이 완전히 비워진 줄 오판하고 통제를 뚫고 들어온 차량 등을 보지 못 한채 폭파가 실행되면서 인명피해자가 발생하였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통제 활동은 확실히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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