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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온다는 우리나라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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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님들은 멋을 알고 계신 민족...

한번 가봐야 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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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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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돈님의 댓글

  • 영양돈
  • 작성일
도자기는 고사하고 의복마저도 백의민족이라고 정신승리 하는데 현실은 옷감염색할 염색제 마저도 시중에 돌지 않았던 노답국가였음...

백의민족 타령하는 사람 있으면 지배계급, 하다못해 궁궐에서 입은게 무엇이었는지 한번 알아보라고 하면 되도 않는 백의민족 타령 바로 치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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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우님의 댓글

  • 우연우
  • 작성일
그런 힘든상황이라고 백의 만족이 아닌건 아니죠;;
 갓하나도 얼마나 멋집니까? 멋과 풍류를 즐기신 조상님들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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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돈님의 댓글

  • 영양돈
  • 작성일
백의민족의 팩트는 이거임 애초에 옷을 만들때 비싼 염료를 구입을 못함 구입을 못하니 염색도 못함 그리고 옷의 세척을 양잿물로 산화시키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식물성 옷감의 본연의 색으로 변화하니 무조건 흰색인 것임

 같은시기 중국의 복색을 보면 일반 피지배계층 평민들도 잘만 염색함... 염색약이 넘사벽으로 비싼게 아니었음 그럼 왜 염료를 옷을 파는 상인들도 구입을 못했냐면 첫째로 외국에도 팔만한 가치가 있는 물품을 국외로 반출을 제한했고 국가에서 지들만 거래하거나 지들한테 상납하는 상인들한테만 거래권을 줌
 
 이게 무슨 의미냐면 지금으로 치면 일반 서민들이 만원이 필요하고 자기가 만들 수 있는 제품을 팔면 십만원을 받을 수 있어서 사실은 자유롭게 판매만 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음... 근데 문제는 그 십만원 짜리 상품을 국가에서 세금으로 물품 자체를(공납) 뺏어가거나 삼성같은 대기업한테 천원에만 팔 수 있게 법을 지정함...

 대표적인 수출품 이었던 인삼의 경우 인삼을 키워도 그 인삼을 나라에 바쳐야 하고 심지어 세금을 내고 남은 인삼도 인삼을 헐값으로 구매하는 공기업에 팔 수밖에 없는 구조임

 이 지랄이니 몇백년 내내 조선의 일반 국민들은 10대때부터 진짜 뼈가 삭을 정도로 일해도 아무 희망도 없이 진짜 의식주만 해결하고 심지어 이것마저도 해결을 못해서 아사하는 지경도 있었음

 선교사들이 조선말기에 조선을 표현하는 걸 보면 국민의 대부분이 무기력증에 걸린 것으로 표현함. 백의 민족은 흰색을 좋아해서 일부러 흰색을 추구한게 아니라 돈이 없고 심지어 사려고 해도 흰옷밖에 선택지가 없었으며 빨래를 하면 흰색으로 만들수 밖에 없었기에 흰색임

밑에 위키에서 긁어온 사람 말은 그냥 거짓말인게 애시당초 백의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발해서 나온 민족주의 구호중에 하나였음 그 이전의 상황은 그냥 끼워맞춘것임

그저 기호의 문제라면 백의민족 타령하면서 보여주는 조선시대의 무채색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두명이라도 염색된 옷을 입어야 정상인데 어디 관리가 아닌 이상 다 흰옷임... 애시당초 흰옷만 시장에서 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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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렌만세님의 댓글

  • 토렌만세
  • 작성일
백의민족(白衣民族)은 흰색 옷을 자주 입었다는 점에서 유래한 한민족의 별칭이다. 후술하듯 몇몇 임금들은 금지령까지 내렸지만 제대로 막지 못한 조상들의 유구하다면 유구한 의복 취향이었다.
일명 백민(白民)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19세기에 한국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남녀를 막론하고 다 흰옷을 입고 있다는 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오페르트(Oppert,E.J.)는 그의 ≪조선기행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에서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고 말하고 있으며, 라게리(Laguerie,V.de)도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895년 전국에 변복령(變服令)과 단발령이 내리자 이에 항의하는 의병전쟁이 일어난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는 백의를 숭상하는 한국인의 집착이 남달리 강했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뒤 일제하인 1920년대에도 백의의 습속은 여전하여 사람들이 운집하는 시장은 마치 솜밭 같이 희다고 외국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수천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고 그 유래의 오래됨을 강조하였다.

백의를 숭상하는 습속에 대해서는 3세기에 편찬된 중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의 “재국의상백(在國衣尙白)”이라든지, 변진(弁辰)의 “의복정결(衣服淨潔)”이라든지, 고구려의 “기인결청(其人潔淸)” 따위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백의는 삼한·삼국시대 이래의 오랜 유습임을 알 수 있고,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은 것을 여러 차례 반포된 백의금지령(白衣禁止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왕 때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태조 7년, 태종 원년, 세종 7년, 연산군 11년과 12년, 인조 26년, 현종 11·12·17년, 숙종 2년과 17년, 그리고 영조 때 여러 차례 거듭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똑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같이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백의의 습속이 끈질기게 우리의 의생활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더욱이 갓난아이에게 흰옷을 입히고 죽을 때 또한 흰옷을 입히니 한국인은 요람에서부터 입관에 이르기까지 백의로 일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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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봄이여님의 댓글

  • 아득한봄이여
  • 작성일
일본 광륭사의 목조 미륵 반가사유상을 이야기 하시는거 같은데
이게 신라제작설이 유력합니다.

.......

이 상이 삼국 중 어느 나라의 상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상과 가장 가깝게 비교되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대하여 신라제작설과 백제제작설이 대립되고 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가운데 어느 나라 작품인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제작설이 다수설이다. 다만 이 상이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일본에 전래되어 아스카시대의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쳐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국보로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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