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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개봉하는 . 알고 가시면 좋을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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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지남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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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9백만을 넘어선 <서울의 봄>에 이어, <노량>도 천만 관객을 넘어서면 좋겠습니다. 사실 둘 다 전국민이 봐야할 영화가 아닐까... (<노량>은 아직 개봉 전이지만, <한산>, <명량>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검증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ㅎㅎ)

 

누구나 아는 전투이지만 기왕 영화도 개봉하는 김에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전투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해 봅니다. (직업병 + 취미인지라ㅎㅎ)

 

덧. 황현필 선생님의 저서 <이순신의 바다> 강추합니다^__^

아직 어린 자녀분들과 함께 보신다면 우선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 실톡> 98회를 추천합니다~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642598&no=102&week=fin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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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이 벌어진 시각은 음력으로 1598년 11월 18일 밤입니다. 지금의 달력으로는 12월 15~16일 즈음이라고 하네요. 전투는 19일 새벽 2시쯤부터 시작되어 정오 혹은 오후까지 계속된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규모는 이순신의 판옥선 83척과 보조선인 협선까지 합쳐 200여척에 병력 1만여명, 명나라 수군은 호선 61척과 보조선을 더해 3백여척에 병력 1만여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및 부제독 등자룡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점, 그리고 안 그래도 명나라 수군은 도대체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지요. 명 수군의 주력선이었던 '호선'은 일본의 세키부네보다도 약했다고 하니;;;

 

조선에서 물러나려던 왜군은 각각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수군과는 멀리 있던 가토는 쉽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고니시는 그럴 수가 없었지요. 순천에서 나가려면 이순신을 피할 수가 없는데,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를 살려보낼 생각이 1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에게 필사적으로 부탁합니다. 자신의 퇴로를 막고 있는 이순신을 협공하자고 말이죠. 한편 남해왜성에 있던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습니다. 고니시는 이들과 합세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구요.

 

왜군의 규모는 시마즈/소/다치바나의 함선 500척, 병력 2만여명이었습니다. 고니시도 함선 300척과 1만 5천여 병력을 갖고 있었지만, 시마즈에게 협공을 제안해놓고 정작 고니시 자신은 튀었죠(...)

+ 이렇게 튄 고니시는 1600년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소속으로, 동군의 가토와 대결합니다. 결과는 다 아시는 것처럼 동군의 승리로 끝나고... 패장 고니시는 할복을 거부하여(...주제에 기독교도였으므로...) 참수형을 당해 생을 마감하지요.

 

새벽에 시작된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기존 전투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한산>, <명량>에서 묘사된 것처럼 백병전은 최대한 피하고 철저하게 '아웃복싱' 전술을 구사했었죠.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노량에서는 달랐습니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었으니 이순신 장군과 조선군의 살기는 상상을 초월했겠지요. 왜군으로서도 살아돌아가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했을 터이니... 이번 영화의 부제가 "죽음의 바다"라고 한 건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우두머리였던 시마즈 요시히로. 이 인간은 사쓰마번... 현재의 규슈 가고시마를 지배하던 자입니다. 왜국 내에서도 가장 용맹하기로 유명했고,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인간이기도 하지요. 이 사쓰마번의 후손들은 이후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 해군의 주축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우리로서는 좋게 봐줄 수가 없는 것들...

 

결국 노량해전은 조선/명/왜의 수군 에이스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최대의 실력과 전의를 갖고 충돌한 현장이었습니다. 희생이 클 수밖에 없는 전투였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강은 역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었고, 왜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나름 후퇴한답시고 남쪽으로 배를 몰았는데... 그 방향이 하필이면 지도에서의 '관음포'였지요. 당시로서는 뱃길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의 수군은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갇힌 왜군을 철저히 소탕합니다. 이에 최후의 저항을 하던 왜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에 조총을 집중사격하고... 그 중 한 발이 송희립 장군에게 맞았습니다. 이어 이순신 장군도 총에 맞고 돌아가시지요.

 

전투 결과, 시마즈 측의 함대 500여척 중 겨우 50여 척막 살아돌아갔습니다. 왜군은 1만 명 이상이 사망했구요. 조선군의 피해는 판옥선 4척 침몰, 전사 3백여명이었습니다. 명나라 전함도 29척이 격침당하고 명군 2,800여 명이 전사했지요.

 

조선군의 전사자 3백여 명 중에 이순신 장군님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정말 원통한 전투였습니다. 워낙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내일 <노량> 개봉을 앞두고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얼마나 실감나게 재현해줄지, 혹은 나름의 상상력으로 변형한 부분은 어디일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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